둘째 날이 밝았다. 추워서 움직이기 싫어 눈은 떴지만 침낭 속에서 꼼짝않고 있는데,
포터들이 일일이 아침식사를 텐트 안에다 가져다 준다.
카야잼 토스트와 바나나 핫케이크에 따뜻한 차를 곁들이니 몸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린자니 스타일 호텔 룸서비스랄까? 황송했다.
식사를 마치니 가이드가 꾸물댈 틈 주지않고, 다음 코스인 호수와 온천을 향해 이동 시켰다.
조금만 오르니 바로 그림같은 뷰가 앞뒤로 펼쳐진다.
앞쪽엔 호수&호수 내 아기화산, 그리고 반대쪽엔 어제 올라왔던 길이자 캠핑했던 곳.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생각에 다들 룰루랄라, 신이 났다.
게다가 내리막길이라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본 호수는 생각보다 지저분해서 아무도 들어갈 생각을 않았고 다들 실망한 눈치였다.
다행히 온천은 모두가 만족할만큼 좋았다. 활화산 온천물에 몸 담그긴 처음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뭔가 부끄러워서 발만 깨작깨작 담궜을테지만
다들 아무렇지않게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다이빙 하는 덕에
나도 함께 가벼운 차림으로 퐁당 들어가 온천을 즐기며 어제 하루간 노고를 풀었다.
가이드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우리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점심을 먹고는 다시 캠핑장으로 이동하는데, 한 시간 가량은 정말 무난한 평지에 갈 만 했다.
허나 그 이후의 한시간 반 가량은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심 엄청나게 힘들었다.
무슨 길 같지도 않은 곳을 길이라고 가는데,
절벽끝에 붙어서 가기도 하고 커다란 바위를 손에 집히는 어떤거든 짚곤 오르내리고,
까딱하다간 죽을수도 있겠구나 싶었고 진짜 목숨걸고 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하루의 마지막은 난코스로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렇게 둘째 날은 4시간 반 가량을 걸어서, 캠핑장에 도착했다.
갑자기 오게 되어 마땅한 신발따윈 없었던 나였다.
평범한 운동화로 험난한 여정을 버텨준 나의 다리야 고마워, 수고 많았어, 내일 하루만 더 버텨다오.
캠핑장에서 다른 모든 텐트가 지어질 때까지 밖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벨기에 커플 고트&매건은 결혼 기념 선물로 가족분께서 티켓을 끊어주셔서
7월부터 여행을 시작해 어쩌다보니 현재 이 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당일이 결혼1주년이랬다.
결혼 1주년을 산에서 단 둘이 맞이하다니, 어쩐지 로맨틱하다!
그렇게 대화 주제가 결혼, 결혼식으로 이어졌고
벨기에 전통 결혼식과 각 의식에 따른 의미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문화가 다르다는 건 참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걸 나눌 수 있는 경험은 더욱 값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고, 각자 텐트로 돌아가 식사가 준비되길 기다렸다.
둘째 날 저녁은 야채볶음과 계란.
포터가 텐트로 밥을 갖다 주면서, 사라는 독일자매 텐트에서 먹는다고 했다.
그래? 뭐! 까짓거 혼밥. 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똑똑, 매건이었다.
"혹시 휴지있음 좀 빌려줄래?" 하면서
"혹시 너만 괜찮다면 우리 밥 같이먹을까?" 한다. 흐잉 나야 좋지!
나왔더니 벨기안 커플 고트&매건이 바깥에 매트를 깔아 내 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덴마크 커플 오스카&시슬도 앉아 웃으며 반겼다.
그렇게 우리 다섯은 다같이 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식사했다.
매건이 사실 독일자매텐트를 지나다가 사라가 같이 있는 걸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너 혼자 밥먹는거지 않느냐, 근데 그럼 좀 그렇지 않느냐,
같이 밥먹으면 더 좋지 않느냐, 우리 아까 이야기도 많이 나눴는데... 했다.
꺅! 순간 조금 감동받았다. 예쁜 마음 고마워!
그렇게 같이 밥먹으면서 서로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선 고트는 체육교사를 하고있고, 매건은 아동심리치료사라고 했다.
어쩐지, 혼밥하는 나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남다르다 했었다.
점점 알아갈수록 고트는 차가워보이는 겉과 다르게 굉장히 배려가 깊었다.
독특한 체질이라 그만큼 까다로웠고, 까다로운만큼 남을 더 세심하게 배려할 줄 아는 듯 싶었다.
그리고 혼자 온 나에게 초반부터 중간중간 괜찮냐고 물어봐주고
늘 주위 모든 이들의 안전을 챙기는 등 생활매너가 깊게 배여있는 훈남 오스카는
선생님이었다가 갓 직장을 관뒀다고 했다.
의대로 진학했다가 진로가 안 맞는것 같아 1년간 쉬고,
다시 건축학을 전공하고 있는 여자친구 시슬의 방학 맞이 겸 함께 여행을 온 것이었다.
덴마크는 정부에서 대학 학비를 지원해 주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공부를 부담없이 할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나의 차례, 네 명의 따사로운 집중 가운데 한국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한국 및 인니 각각 일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한국에 현재 근무 환경과 맞벌이 현황 등을 설명해 주었더니
매건은 바로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것이냐? 질문했고,
맞벌이로 아이들은 방치되거나 교육기관에 맡겨지는 게 대부분이고
그런식의 사교육은 대학교를 가기 전까지 쭉 이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은 어린 시절부터 교육열에 노출되고 경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커서는 분야만 공부에서 일로 바뀔 뿐,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속에 파묻혀 힘겹게 하루하루 버텨간다.
나도 한국에서 평범하게 회사를 다닌다면 이런 식으로 긴 여행은 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다들 진지하게 얘기를 듣고 서로의 생각과 이런저런 방안을 나눠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작은 호의가 가져다 준 큰 감동,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상대를 대함으로써 알아가는 기쁨,
나이국적불문하고 이루어지는 소통 등 많은 걸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저녁이었다.
하지만, 텐트내 침낭 속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밤은 그날도 어김없이 너무나도 차갑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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